기사상세페이지

미추홀 고도 문학산 날개를 펴다

기사입력 2015.12.01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50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문학산의 역사적 의미
    2016년 새해 해맞이는 문학산 정상에서?
    ▶문학산(성) 정상부 50여년만의‘개방 합의’어떻게 추진됐나?
    문학산은 인천이라는 이름이 태동한 역사의 중심지로서 인천시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자, 300만 시민의 혼이 담긴 곳이다.
     
    지난 10월 15일 인천 시민의 날을 맞아 50여년 만에 개방된 「문학산(성) 정상부」를 많은 분들이 가보셔서 아시겠지만, 문학산 정상부는 지역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갖추었으며, 해발217m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인천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둥지이다. 또한 비류백제, 미추홀 왕국의 발상지로 유서 깊은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인천시는 광복이후, 경인고속도로와 경인철 등이 놓이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지역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인천시만의 역사문화유산을 계승·발전시키는데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기에 민선6기에 들어 선 인천시는 줄곧 인천의 가치를 재창조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에 따라 1965년부터 1976년까지는 미군 방공포대가 1977년부터 현재까지는 공군부대 주둔으로 50년간 폐쇄돼 있던 인천의 진산 「문학산(성) 정상」을 시민의 품으로 되돌려주고자 군사기밀 등으로 제한사항이 많은 국방부, 국방시설본부, 공군 방공유도탄사령부, 공군제3방공유도탄여단 등 관계기관에 올 1월부터 “문학산 정상부 개방 건의”를  지속적으로 협의한 결과, 지난 7월 27일 아래와 같은 내용의 “조건부 전면 개방”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주요 조건부 내용)
    ∙ 주간에만 개방
    ∙ 훈련 및 작전수행을 위한 군 요구 시, 개방 일시적 중지
    ∙ 정상부 내 시설물 개ㆍ보수 및 추가 설치 시 군과 사전 협의 확행
    ∙ 시설물 설치 이후라도 군의 작전 제한 이유로 철거 요구 시 수용
    ∙ 군에서 지정한 지역에서만 사진 촬영 허용
    ∙ 향후 군의 안정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문학산 정상부 진지 폐쇄ㆍ이전 요구 금지 및 토지 무상사용동의 협조
     
    비록 문학산 정상부가 유사시‘전투예비진지’로 사용되어야 하는 안보요충지이기 때문에, 낮 시간에만 개방되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되찾아야 한다’는 300만 시민의 단합된 힘을 보여주었고, 인천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겠다.
     
    이에, 인천시는 시민들에게 개방하기에 앞서 군부대와 개방 합의서를 체결하고 시민의 안전성 및 조망권 확보, 군시설 보안 등을 위해 1단계 시설물 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제51회 시민의 날을 맞아 정비공사 준공식 및 기념행사로 「문학산 정상 개방 고유제(告由祭)」를 개최했다.
     
    ‘고유제(告由祭)’는 국가나 개인이 중대한 일을 치른 뒤에, 또는 장차 치르고자 할 때에 조상이나 신들에게 그 사유를 고(告)하는 제사로서 300만 인천 시민의 한결같은 희망과 염원으로 이룬 커다란 성과(문학산 정상부 개방)를 ‘고(告)’하는 행사이다.
     
    문학산 정상 개방 행사는 지난 10월 15일 오후 2시 700여명이 활짝 열려 있는 출입문을 통과하여 걸어 올라가는‘길놀이’행사를 시작으로 문학산 표지석 ‘제막식’, 고유제(告由祭)’, 봉수대 거화(擧火)의식, 희망 연날리기, 깃발 퍼포먼스, 축하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로 진행되었으며, ‘길놀이’ 행사는 군부대 철책 문이 50년 만에 개방되는 새로운 출발과300만 인천시민의 염원으로 이룬 성과를 축하하고 시민화합의 의미로 10개 군·구 대표 풍물단의 흥겨운 사물놀이와 참석하신 시민여러분이 함께 걸어서 문학산 정상을 처음 밟는다는 큰 의미로 마련되기도 하였다.
     
    인천시의 특단의 노력으로 개방된 지 두달이 채 안 되었으나 문학산은 벌써 인천시민 뿐만 아니라 수도권 지역민들이 많이 찾는 명소로 발돋움 하고 있으며, 시민의 염원을 담아 끈질긴 이해와 설득을 통하여 50년간 군부대가 주둔한 지역을 인천 시민에게 돌려준 사례로 호평 받고 있다. 또한, 민선6기 시정방침인 “인천만의 가치창조”실현을 위한 새로운 상승 모멘텀을 형성하게 됐다.
     
    ▶50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문학산(성)” 역사적 의미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난 50년간 인천 정신의 뿌리이자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문학산 정상이 군부대의 주둔으로 폐쇄되어 있었다. 시민들은 군부대가 있는지도 모른 채 정상부 밑으로 조성된 등산로를 이용하며 문학산 주변만을 보았다. 인천시가 국방부와 각고의 협의 끝에 인천만의 가치 창조 실현 차원으로 문학산 정상부를 50년 만에 개방했다.
     
    오늘 보도에서는 시민들에게 인천의 뿌리를 간직한 문학산(성)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고, 현재의 문학산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문학산 명칭의 유래
    먼저 ‘문학산’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자.
    예부터 ‘문학산’은 고을 관아 남쪽의 안산(案山)으로 여겨져 ‘남산(南山)’, 학이 날개를 편 형상이라 하여 ‘학산(鶴山)’, 산성이 있어서 ‘성산(城山)’이라 불렸다. 문학산이라는 명칭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인천 부사로 재임 중 학문과 교화에 힘썼던 이단상(李端相)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학산에 만들어진 ‘인천서원’이 1708년(숙종 34) ‘학산서원’이라 사액(賜額)을 받게 되는데 이때 ‘문묘(文廟)’와 ‘학산(鶴山)’의 음을 따서 ‘문학’이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고 있다.『여지도서』와『해동지도』등 18세기 중엽 이후의 지지(地誌)와 고지도에 ‘문학산’이라 표기되어 있다.
     
    ▶인천 역사 속의 문학산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문학산 일대는 바다와 인접한 자연, 지리적 조건으로 일찍부터 생활 터전이 되었다.『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기록된 바, 기원전 18년 인천 역사의 출발지인 비류의 미추홀로 자리한 이래, 2015년 현재 2033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문학산은 전근대 시기 읍치(邑治)인 인천도호부 관아의 앞쪽에 위치하여 안산(案山), 혹은 남산으로 불렸지만, 실제적으로는 인천 지역의 정신적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에 사람들이 두루 살기 시작한 시점을 신석기시대부터 이다. 당시는 주로 강이나 해안가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점차 청동기 문화를 접해 갔고 이후, 부족연맹체 단계를 거쳐 고대국가를 건설해 갔는데, 바닷가였던 인천은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백제’의 출발 이전에 이른바 ‘마한’이라 불렸던 ‘54개의 부족연맹체’가 있었다.
     
    이런 무리를 모아 고대국가 단계로 이끈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사기』의 ‘비류 전승’이다. 기원전 18년 ‘비류’의 ‘미추홀’ 정착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고, 고인돌이나 토기 등이 당시를 말해 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산 일대는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쟁패 속에 부침을 거듭하다가 고려 왕조에 들어와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해상무역으로 성장한 호족세력인 인주 이씨(仁州 李氏)와 함께 다시 한번 왕가(王家)의 고향으로 거듭 태어났다. 7대에 걸쳐 80년 동안 고려의 정권을 장악해 한때는 ‘칠대어향(七代御鄕)’으로 기록된 인주 이씨 시대가 펼쳐졌다. 조선시대에 이 곳을 중심으로 인천도호부 관아와 향교, 학산서원이 자리 잡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세조가 왕비인 정희 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인천을 도호부로 승격하였는데 조선 말기까지 도호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문학산 일대는 중심지로서의 자리를 잃고 1914년에는 부천군에 속했으며 인천도호부 관아에는 보통학교가 들어서고, 경찰주재소가 설치되기도 하는 등 구읍(舊邑)으로 변모해 갔다.
     
    비류가 미추홀을 택했던 것은 바다와 가까운 입지 조건이 당시 소금을 매개로 해상교역망을 장악함으로써 정치적 성장을 꾀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곡이 중요한 운항로였고 교통의 요충지이자, 국방상 중요 거점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물론,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문학산성에 진지를 두고 강화도에서의 전쟁 진행 상황을 살폈던, ‘소성진중일지’의 기록을 통해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광복 후의 문학산
    조선시대 왕비(王妃)의 고향으로 또 도호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던 인천은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읍(舊邑)으로 전락했고, 인천 정기의 상징이던 문학산을 파괴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약간의 조사 자료를 남긴 것 외에 별다른 보호조치가 없었는데 광복과 6․25전쟁 당시 산림이 황폐화되면서 산성도 더욱 퇴락하였다. 1958년 허물어진 동문을 복원하여 ‘문학산성동문(東門)’이라 새겨 넣었고, 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십제고도문학산성(十濟古都文鶴山城)’이라는 표석을 세웠다. 그러나 문학산의 전략적 가치가 높았던 까닭에 1965년 미군 기지가 들어섰고 1977년 국군이 이어 받게 되었다.
     
    문학산성은 1986년 12월 18일 인천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산성 전반에 대한 지표조사를 진행하여 대체적인 현존 성벽의 잔존 여부와 축성기법 등을 파악하였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577m로 현존하는 부분은 339m이고,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부분은 220m이다. 성벽의 높이는 최저 30㎝에서 최고 4m까지 이르고, 1.5m 정도 높이로 남아 있는 부분이 가장 많다. 그리고 산성 내부 시설로 ‘내성(內城), 봉수대, 안관당, 우물’에 대한 조사도 진행되었다. 2014년에는 삼호현에서 문학산성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중턱에서 산성 주변 방어진지로 추정되는 유적에 대한 시굴조사를 진행하여 건물터 및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1942년 조선총독부의 조사 자료인『조선 보물 고적 조사 자료』는 문학산성 내 정상부에 있는 토단(土壇)을 봉화대 혹은 미추왕릉이라 소개하였다. 광복 후 1949년 인천시립박물관장이었던 이경성은『인천 고적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이듬 해 발발한 6․25전쟁으로 인해 간행이 좌절되었다. 이후 미간행 원고를 재구성한 뒤 1953년『인천공보』에 연재함으로써 인천 향토사 연구의 기초를 다졌다.
      
    1956년 인천시립박물관장 유희강은『향토 인천의 안내-고적, 명승, 천연기념물』을 발간하여 연구의 폭을 넓혔다. 그리고 1965년 의료인이면서 사진작가이던 이종화는 당시로는 드물게 컬러 사진집인『문학산(文鶴山)』을 출간, 문학산 일대의 파노라마 사진과 봉수대, 성문, 성벽, 비류왕릉으로 불리던 고총, 안관당지, 고인돌 등 인천의 옛 모습을 오늘에 전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문학산의 문화유산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문학산 일대는 바다와 인접한 자연 지리적 조건으로 일찍부터 생활터전으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고인돌, 각종 석기류와 무늬없는 토기편 등이 출토되기도 했으며, 백제 건국 시조의 하나인 비류(沸流)와 관련된 전설이 문학산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등 역사적 의미를 지닌 문화유산들이 집약되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문학산에는 문학산성 외에도 봉수대, 우물, 안관당, 수리봉, 왜성지 등의 흔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산성
    문학산성은 인천의 대표적인 관방 시설이다. 테를 두른듯한 모양의 테뫼식 산성으로 정상 부분에 석성으로 축조됐으며 미추홀 고성, 남산성 등으로 불렸다. 처음에는 토성이었던 것이 삼국 말 또는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석성으로 개축되었고 이것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성 전체 구간을 일정한 크기로 자른 돌을 다듬지 않은 상태로 자연 지형을 최대한 잘 이용해 가며 쌓았다. 아래는 무겁고 긴 돌을, 위로 올라갈수록 작고 가벼운 돌을 뒤로 물려가며 쌓는 전통 방식을 사용하였다. 1997년 실측조사에 따르면 성곽의 길이는 577m였으나, 339m 정도만 남아 있다. 면적은 20,790㎡이다. 1986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문학산성 우물
    우물은 산성의 입지 조건의 기본이 된다. 문학산성 안에 우물터가 있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소천(小泉)’,『동사강목』에는 ‘비류정(沸流井)’으로 기록되어 있다. 산성 서문에서 150m 떨어져 한층 낮은 곳에 돌로 우물 벽을 쌓았다.
      
    우물에 막대기를 들이밀면 그 끝이 팔미도 바다 위로 나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1979년 군부대 시설을 지으며 파묻혔는데, 당시의 모습은 원형으로 높이가 60㎝, 깊이는 20m에 달하였다고 한다.
     
    ○봉수대
    문학산 봉수는 갑오개혁을 전후로 봉수제도가 폐지되기 이전까지 사용되었다. 멀리 전라도 순천에서 출발하여 진도, 수원 그리고 안산의 정왕산 봉수를 이어 부평 축곶 봉수로 연결되어 김포, 강화, 양천을 거쳐 한성의 남산에 이어지는 노선으로 조선의 군사적 통신수단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 성안에서 바라보면 북쪽으로는 인천향교를 비롯한 인천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서쪽으로는 서해가, 남쪽으로는 연수구의 신시가지가 바라보인다.
      
    문학산성은 인천의 남쪽을 받치고 있으면서 서해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있어 유사시 전술을 수행하는 데 쉬웠을 것이고 방어에도 유리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산성 안에 있던 봉수대는 산 정상부에 3m 높이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봉수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볼록하게 올라온 모양이 마치 배꼽처럼 생겨서 문학산을 ‘배꼽산’으로도 불렀다.
     
    ○수리봉 왜성지(倭城地)
    문학산성 동문 자리에서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100m가량 떨어진 곳이 수리봉이다.『여지도서』에 따르면, 이곳에 임진왜란 당시 문학산성을 공격하던 왜군의 성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한편, 수리봉에서 산성의 동문 쪽으로 통하는 능선이 문학산성을 공략하기에 가장 수월한 곳임을 고려한다면, 본래 산성의 일부를 왜군이 장악하고 이용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학산서원
    학산서원(鶴山書院)은 조선시대 인천 유일의 사액(賜額)서원이다. 1702년(숙종 28) 이정빈(李廷賓)을 비롯한 100명의 유생이 국왕에게 ‘인천부서 이단상(李端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서원 건립’을 상소하여 설립되었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공사가 지연되어 6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에 이르러서야 공사가 완공되었고, ‘학산(鶴山)’이라는 액호를 받아 사액서원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1725년(영조1) 이단상의 아들 이희조(李喜朝) 역시 인천에서 선정을 하여 부자의 유풍을 남겼으므로 추가로 배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부자가 나란히 학산서원에 모셔졌다.
      
    학산서원에 대한 기록은 1731~37년 서원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는 중수기(重修記) 외에 다른 기록은 찾을 수가 없으며, 1864~71년 단행된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현재 이 일대 대부분은 2002년경에 완공된 문학나들목 및 터널 공사로 원래 지형이 심하게 훼손되면서 매장 문화재도 완전히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2004년 학산서원 터로 추정되는 자리 근처에 기념 표지석을 다시 세웠다.
     
    ○안관당
    안관당(安官堂)은 문학산성 안에 있었던 제의시설로 알려진다.
    1949년 조사에서 문학산 봉수대 동쪽에 7m×3m의 네모꼴 석축 유구가 발굴되었는데, 이것을 안관당 터로 추정하였고, 1953년『인천의 고적』에서 안관당은 조선 말엽의 건물로 임진왜란 때 산성에서 왜적과 싸운 김민선을 모신 사당이라 적고 있다. 인천부사 김민선(金敏善)은 임진왜란 당시 문학산성을 중수하여 백성들과 함께 왜군을 격퇴하려다가 병사 했다고 전해진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의 기록인『소성진중일지(邵城陣中日誌)』에는 “인천부사 구완식(具完植)이 문학산신께 제사를 드렸는데, 마치 그 영험을 보듯이 산신이 한 군교의 꿈에 나타나 서양 오랑케를 크게 무찌르라는 말을 남겼고, 이를 군사들에게 널리 알려 사기를 진작케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실제 안관당 내부를 본 사람들은 나무 인형에 의복을 입힌 ‘안관할아버지, 안관할머니’라 불린 신상이 있었고, 매년 정월 보름 안에 제를 지내며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빌었다고 한다.
     
    ○홍우순 신도비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홍우순(1791~1862)의 묘비이다. 그의 묘가 제운리(현 학익동)에 있어 이 지역 사람들은 그를 제운(霽雲) 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홍우순 신도비(洪祐順 神道碑)는 1991년까지 남아 있었으나, 제2경인 고속도록 건설과 뒤이은 연경산 일대에 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없어져 버렸다. 다행히 1949년 조사 때 비문 내용을 필사해 둔 것이 전하고, 탁본 한 벌도 남아 있다.
      
    이 배는 기단 위에 오석(烏石)의 비신과 화강석의 옥개석을 얹은 것으로, 크기는 전체 높이가 290㎝이고, 비신은 높이 196㎝, 폭 105㎝, 두께 33㎝의 양면비이다.
     
    ○문학산의 사찰
    문학산 일대에는 인천의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찰이 있었다.
      
    문학사는 문학산 북쪽 정상에서 약 80㎝ 정도 아래 산 중턱에 있던 조선시대 사찰이다. 법당과 승당 두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흔적이 남아 있고, 백자향로 조각과 문양이 특이한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길마사는 문학산 동쪽 봉우리인 길마산 중턱에 있던 절이다. 산 북쪽 중턱에 2단으로 고른 땅에 돌 받침과 큰 초석이 흩어진 절터가 있었다. 1949년 조사에서 2채의 건물이 확인되었는데, 북쪽 건물은 가로 3m, 세로 2.46m 였고, 남쪽 건물은 가로 2.1m, 세로 1.5m 정도 였다. 절터 주변에서 조선시대 기와 조각과 토기류가 발견되었다. 제2경인고속도로가 만들어지며 이 일대의 지형이 많이 바뀌어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연경사는 연경산 서쪽 산봉우리 가까운 골짜기에 있던 사찰이다. 출토 기와 조각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는 그 흔적을 확인하기 어려우나 6칸 건물 셋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문학산에 얽힌 이야기
    문학산을 오르는 길목에는 백일기도를 드리면 아기를 얻는다는 산신우물이 있으며, 문학동과 청학동 사이에는 백제시대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능허대 근처 한나루에서 배를 타기 위해 넘나들던 삼호현이라는 고개가 있고, 이 고개 너머의 청학동 쪽에는 술이 나왔다는 중바위와 갑옷바위 등에 얽힌 사연들도 전해진다. 이처럼 문학산 주변은 2030여년 인천 역사와 함께 많은 전설과 일화들을 간직하고 있다.
     
    ○삼호현(사모지고개)
    삼호현(三呼峴)은 문학산 주봉과 연경산 사이에 있는 고개로 남구 학익동과 문학동에서 연수구 청학동으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삼국시대에 중국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은 한산(漢山)에서 부평의 별고개[별리현(別離峴)]를 넘고, 다시 사모지고개를 넘어 지금의 옥련동에 있던 한나루[대진(大津)]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그 때 사신을 배웅하러 따라 나왔던 가족들이 별고개에서 이별을 나누고, 사신들이 사모지고개에 이르러 별고개에 여전히 서 있던 가족들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세 번 부르며 아쉬움을 달랬다 하여 ‘삼호현’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삼호현을 ‘삼해주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이름은 그 고개에 있던 큰 바위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위꼭지에 마치 동이와 같이 생긴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구멍에 삼해주가 가득 차있어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숨이 차고 목이 마르면 그 술을 떠서 마셨다고 한다. 삼해주는 한 잔만 마셔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욕심을 부려 술을 그 이상 마셔서 그만 술이 말라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때문에 ‘삼해주현’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으로 여겨지며, 이와 유사한 갈래의 이야기들이 전승되고 있다.
     
    삼호현은 연수구 앞바다에서 채취한 해산물을 팔러 가는 주민들이 이용했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문학터널로 진입하는 사거리쯤에 삼호현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터널 옆으로 난 산길을 이용해야 한다. 고개 정상에는 학익동과 청학동, 연경산과 문학산을 이어주는 등산로가 있다.
     
    〇술바위(중바위, 삼해주바위, 사모주바위)
    옛날 술바위에는 신기하게도 술이 나왔다고 전한다. 지나가는 길손이 삼호현 고개에 접어들어 쉬어 갈 때 바위에서 여인이 나와 술 석 잔을 권하고 들어갔다고 한다. 술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기 때문에 어느 날 이 근처를 지나던 중이 술 석 잔을 비우고 욕심을 부려 더 마시려하자 여인은 사라지고 그 이후로 다시는 술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술바위는 ‘전설 따라 삼천리’에 소개된 일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바위로, 오랜 세월 구전되어 내려오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〇갑옷바위
    갑옷바위는 어떤 장군이 인천에 난리가 나면 이곳을 구원해 준다고 하며 이곳 바위 밑에 갑옷과 투구를 숨겨놓고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학산 안관당을 지키는 당지기(일명 무당)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 바위 안에 숨겨 놓은 갑옷을 확인하려고 몰래 도끼로 바위를 내려쳤다. 그 순간 벼락이 내리쳐 당지기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바위 중간이 깨지면서 갑옷도 사라져 버렸다고 전한다.
     
    〇산신우물
    길마산 전망대에서 문학동 주거지역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제2경인고속도로 터널을 지나는데 그 바로 밑에 산신우물이 있다. 이곳에는 아이가 없는 부부가 우물에서 정성을 다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하는 설화가 전해진다. 자녀의 출생 및 육아, 성장을 관장하는 신을 삼신(三神) 또는 산신(産神)이라고 부르는데, 이 신의 이름에서 명칭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문학산 정상 오르는 길 및 개방시간 안내
    문학산 정상에 오르면 보통의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자연 풍광과는 다르게 사방으로 도심의 풍경을 느낄 수 있어 색다른 느낌이라며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선 벌써 입소문이 났다. 북쪽을 바라보면 멀리 서울의 남산, 관악산부터 계양산, 인천대교, 연수구, 송도국제도시까지 인천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남쪽으로는 연수구, 송도국제도시, 남동구, 안산 시화호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인천은 물론 사방으로 서울, 경기도까지 걸리는 것 없이 전망할 수 있다.
     
    현재 문학산 정상은 1단계 시설물 공사를 마친 상태로 전망대와 망원경, 안내판, 벤치, 파고라 등이 갖춰져 있다. 위아래로 쭉쭉 뻗어있는 모음이 산의 힘찬 정기를 느끼게 하는 표지석 또한 인기다. 이 표지석은 강원도 영월에서 구해온 자연석으로 인천 강화도 출신 서예가 심은(沁隱) 전정우 선생의 친필로 새긴 작품이다.
     
    문학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인천 남구 학익동 쪽에서 이번에 개방한 군부대 작전도로를 통해 올라가는 길과 연수구 쪽에서 둘레길을 따라 오다가 정상 쪽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이 두 개의 문은 개방시간이 동절기(11월~3월) 09시~17시, 하절기(4월~10월) 08시~19시로 국방부와 협약이 된 상태다. 개방시간 외 시간과 국가위기사태 발생이나 평상시 작전이나 훈련 때는 시민 개방을 통제한다. 그래서 정상에 가고자 한다면 개방시간에 유의해서 올라가야 한다. 
     
    ‘문학산’은 비류의 미추홀로부터 2015년에 이르기까지 2033년이 넘는 인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보고(寶庫)이다. 여기에 날개를 펼친 학(鶴)을 닮아 있어 그 명칭이 향교의 문묘(文廟)와 학산서원(鶴山書院)에서 연유되었다는 정신적 자긍심이 담겨있다. 그간 문학산성 보존과 등산로 정비 및 탐방로 조성을 통해 시민들의 관심과 문화재적 가치가 점차 증폭되고 있던 차에, 이제 50여년의 긴 세월을 뒤로 하고 문학산 전체가 인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인천 가치의 재창조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비상(飛翔)의 또 다른 출발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2016년 새해에 문학산 정상에서 밝아오는 해를 맞이해 보는 새로운 체험도 뜻 깊은 한해의 시작점이 될 것 같다.
     
    ▶향후 문학산을 시민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은?
    앞으로 지난 50여 년간 군부대시설이 있어 시민의 접근이 금지돼온 문학산을 어떻게 유지․관리․보전하느냐가 관건이다.
     
    인천시에서만 유지․관리의 방향을 결정하기 보다는 시민이 주인으로서 시민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협의체(governance)를 구성, 역사적 보존과 복원 그리고 시민과 함께하는 문학산이 되도록 여러 방안들이 다양하게 제시되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우선, 군부대와 추가적인 협의를 통해 2016년도에 아직 개방되지 않은 2단계 지역의 등산로 및 주변 시설을 정비하여 전면 개방하고, 군부대 주둔으로 인해 훼손된 산림회복 및 더 많은 시민들이 산을 등반하는데 안전 확보와 불편사항이 최소화 되도록 이용 활성화 사업을 추진 문학산을 잘 가꾸고 보전하여 인천만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으로 만들 계획이며, 장기적으로는 문학산성을 국가지정 ‘사적’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지표조사 및 성곽복원 등 역사와 환경을 되살리는 사업도 병행 추진할 계획이다.
    backward top home